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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9. 19世 〉30. <부정공>학생공휘우겸묘표(學生公諱友謙墓表)
1. 문헌 목록 〉19. 19世 〉32. <부정공>계은공휘두현행장(溪隱公諱斗鉉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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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부정공>송파공휘진근묘표(松坡公諱珍根墓表)
松坡公諱珍根墓表 昇平治之西北廣川上白鹿村後負辛之原에封馬鬣而崇四尺者는松坡趙公之藏也公의諱는珍根이요字는應斌이며松坡는其號也淳昌人인대高麗檢校侍中諱璋을爲鼻祖하고三傳而諱元吉은玉川府院君으로諡忠獻公이요號는農隱인데功存宗祊하여名齊圃牧하고是生諱瑜의官은副正인데値麗氏屋社하여는入杜門洞하여守罔僕義하고我朝에서徵以靈光郡守漢城判尹하되皆不就하니世宗이旌其門曰孝子前副正趙瑜之閭라하고士林이立祠謙川而享之하니라再傳而諱智崙은察訪인데築相好亭하여四昆季同處一亭하니有江淮大衾之風이요諱大春의官은勵節校尉요號는三灘인데學問이精博하여爲世推重이러니值乙巳禍하여晦跡立泉이라가築亭漾碧江上하여與河西金先生玉峯白公으로爲道義交하여多有唱酬하고諱懋는以才行으로薦禮賓寺參奉하니라曾祖諱는顯望이요祖諱敬夏는贈嘉善大夫户曹參判이며父의諱는相淳이요妣는昌寧曹氏인데丙寅五月十六日에生公하니天姿가端粹하여甫及行走에動止가安詳하고言笑를不妄하며性이至孝하여志軆之養이兼至하고事無大小히不敢自專하며父母之前에叱咤之聲이不及犬馬하고友于昆季하여湛樂怡怡之情이溢于辭色하니라治家謹嚴하여巫覡符章을絶於言議하며敎子姪에必以義方하고訓婦女에必以禮別하며待人接物에重其然諾하고盡於謀忠하며安貧自守하여服田力穡하되忘勞晏如하고暇日劬書하니案頭筆碩磛無枯乾하고經史子集을靡不涉獵하며就古人切要語하여可有補於日用者면隨錄成編하여名以訓誥而貽于兒孫하여俾得觀者而自修焉하니라若其交遊則必取有德者而於族老竹圃公을最善하고農夕追從하여或挑燈而講時義하고或把酒而論古今하여以爲晚暮麗澤二資라가戊子五月十七日卒하다配陽城李氏는龍根女로生于丙寅하여卒于己酉하니墓合祔하다育四男四女하니長埈孝次哲孝勍孝剛孝요女適晋州河應晋錦城羅基元竹山安圭恒慶州金龍槽하고孫男在鉉三鉉朱鉉女全州崔相植密陽朴來景昌寧曺昌煥은長房出이요大鉉甲鉉公鉉光山金箕涉은次房出이며企鉉은季房出이고餘不盡沭하다嗣胤埈孝가錄公之實事하고來通明山峽하여要余竪表之文은盖以其同根也니噫라當此懷之日하여父母有善을視以巴俚者滔滔皆是而公之胤子講不明不仁戒하고片性隻行을掇拾不遺而欲昭示來世하니所謂孝思不匱永錫爾類者非耶아遂不辭而略加檃栝하여序次如右 丙申二月既望 宗後生 敏植 撰 송파공휘진근묘표(松坡公諱珍根墓表) 순천(順天) 서북쪽 광천(廣川) 백록촌(白鹿村) 뒤 신좌(辛坐) 언덕 마렵(馬鬣:말갈기)에 있는 네자 높이의 무덤은 송파(松坡) 조공(趙公)의 묘소이다. 휘(諱)는 진근(珍根)이요 자(字)는 응빈(應斌), 송파는 그분의 호(號)이다. 순창인(淳昌人)으로 고려 검교시중(檢校侍中) 휘 장(璋)을 시조로 하며 三대를 내려와 휘 원길(元吉)은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으로 시호(諡號)는 충헌(忠獻), 호는 농은(農隱)인데 나라에 공(功)이 있어 이름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나란하였다. 이분이 휘 유(瑜)를 낳으셨는데 벼슬은 부정(副正)으로 고려가 망할 때를 당하여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를 지키셨으며 우리 조선(朝鲜)에 들어와서는 영광군사(靈光郡事)와 한성판윤(漢城判尹)으로 불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으니 세종(世宗)께서 정려(旌閭)를 내려 「전부정 조유의 정려(孝子前副正趙瑜之閭)」라고 하였는데 사림(士林)에서 겸천사(謙川而)를 지어 제사를 모시고 있다. 二대를 내려와 휘 지륜(智崙)은 찰방(察訪)인데 상호정(相好亭)을 지어 네 형제가 이 정자에서 함께 지내면선 한 이불을 덮고 잔 옛사람의 풍도(風度)가 있었다. 휘 대춘(大春)의 벼슬은 여절교위(勵節校尉)로 호는 삼탄(三灘)이신데 학문이 박식하여 세상에서 존경하였는데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당하여 시골로 몸을 숨기어 양벽강(漾碧江) 위에다 정자를 짓고 하서(河西) 김인후(金隣厚) 옥봉(玉峯) 백광훈(白光勳) 선생과 더불어 도의(道義)의 교제를 맺어 함께 읊은 시(詩)가 많으며 휘 무(懋)는 재주와 행실로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천거되셨다. 증조(曾祖)의 휘는 현망(顯望)이요 할아버지의 휘는 경하(敬夏)로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셨으며 아버지의 휘는 상순(相淳),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인데 병인년(丙寅年) 五월 十六일에 공을 낳으셨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단아(端雅)하였는데 겨우 걸어다닐 나이부터 행동이 의젓하고 망령된 말을 하지 않으셨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모님의 뜻을 받들고 맛있는 음식 봉양을 겸하여 하셨으며 크고 작은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는 일이 없으셨다. 부모님 앞에서는 짐승조차 꾸짖는 일이 없었으며 형제들과 우애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기색이 얼굴에 넘쳤다. 집안을 엄히 다스려 무당(巫堂)이나 부적(符籍)을 논의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자질(子侄)을 가르치면서는 반드시 의로운 방법으로 하고 부녀자들을 가르치면서는 반드시 예의로 구별을 두도록 하셨다. 남을 대해서는 승낙하는 일을 신중히 하시고 충심을 다하셨으며 가난을 편하게 여기고 힘써 농사를 짓되 수고로움을 잊은 채 편안하게 생각하셨다. 한가한 날에는 독서(讀書)에 힘써 상(床)에는 붓과 벼루가 잠시도 마른 적이 없고 경서와 문집과 역사책을 섭렵(涉獵)하지 않은 것이 없으셨으며 옛 사람의 중요한 말 가운데 자신에게 보탬이 될 말은 간추려서 써서 책으로 만들어 훈고(訓誥)라 이름하여 자손에게 물려주어 보는 자로 하여금 수양(修養)하도록 하였다. 덕망(德望)이 있는 자를 가려 교유(交遊)하였는데 그 가운데서도 집안 어른 죽포공(竹圃公)과 가장 사이좋게 지내면서 아침 저녁으로 함께 지내면서 더러는 등불을 밝히고 당시의 의리(義理)를 강론하기도 하고 더러는 술잔을 기울리며 고금의 일을 논하면서 만년에 서로를 면려(勉勵)하다가 무자년 五월 十七일에 돌아가셨다. 배위(配位) 양성이씨(陽城李氏)는 용근(龍根)의 따님으로 병인년에 출생하여 기유년에 돌아가셨는데 묘(墓)는 합봉(合封)이다. 四남 四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준효(埈孝) 다음은 철효(哲孝) 경효(勍孝) 강효(剛孝)요 딸은 진주(晋州) 하응진(河應晋) 금성(錦城) 나기원(羅基元) 죽산(竹山) 안규항(安圭恒) 경주(慶州) 김용조(金龍槽)에게 출가하였다. 손자 재현(在鉉) 삼현(三鉉) 주현(朱鉉)과 전주(全州) 최상식(崔相植) 밀양(密陽) 박내경(朴來景) 창녕(昌寧) 조창환(曺昌煥)에게 출가한 손녀는 큰아들 소생이요, 대현(大鉉) 갑현(甲鉉) 공현(公鉉)과 광산(光山) 김기섭(金箕涉)에게 출가한 손녀는 가운데 아들 소생이요 기현(企鉉)은 막내아들 소생이며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못한다. 맏아들 준효(埈孝)가 공의 사실을 적어가지고 통명산(通明山) 아래로 찾아와서 나에게 묘표(墓表)에 쓸 글을 청하는데 개개 가까운 일가이기 때문이다. 아, 이처럼 윤리(倫理)가 무너지는 날을 당하여 부모의 선행(善行)을 모두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데 공의 맏아들은 부모의 선행을 밝히지 않은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라는 경계를 강구하여 조그마한 선행이라도 주워모아 빠뜨리지 않아 후세에 전하고자 하니 이른바 효성을 다하여 후세에 남겨준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사양하지 않고 대략 중요한 사실만 이상과 같이 적는다. 종후생(宗後生) 민식(敏植)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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